'신의 직장' 에쓰오일, 1분기 적자만 1조…충격에 빠진 정유업계
유가 급락에 정제마진 악화
원유 재고분도 대규모 손실
< 텅 빈 석유제품 출하장 > 국내 정유업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수요 감소와 국제 유가 급락, 정제 마진 악화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울산 남구 SK에너지 석유제품 출하장이 수요 감소로 한산하다.
에쓰오일이 지난 1분기 1976년 창사 이후 가장 많은 1조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시작된 국내 정유업계의 피해가 확인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에쓰오일은 1분기 영업손실이 1조73억원으로 집계됐다고 27일 공시했다. 매출은 5조1984억원으로, 1년 전 같은 기간(5조4262억원)보다 4.2% 감소했고 손익은 2704억원 흑자에서 적자로 전환했다. 분기 적자는 지난해 2분기(905억원 손실) 이후 세 분기 만이다.
에쓰오일의 대규모 적자는 모두 정유 부문에서 발생했다. 석유화학과 윤활기유 부문은 1분기 각각 665억원과 1162억원의 이익을 낸 반면 정유 부문의 영업손실은 1조1900억원에 달했다.
올 들어 국제 유가 급락으로 정제마진(석유제품 가격-원유 가격)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등 손해를 보며 장사한 탓이다. 원유와 석유 재고분도 유가와 상품 가격이 하락함에 따라 대규모 손실로 잡혔다.
국내 정유4사 중 가장 먼저 실적을 발표한 에쓰오일이 쇼크 수준의 실적을 내놓으면서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등의 실적도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정유4사의 1분기 영업적자 규모가 4조원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유4社 덮친 '적자 쓰나미'…"2분기는 더 비관적"
"제품 만들수록 손해"…에쓰오일 1조 적자 '충격'
“충격적인 숫자입니다. 실적 전망치가 하루 단위로 낮아지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국내 정유업계 고위 관계자는 27일 에쓰오일의 1분기 영업손실이 1조원으로 나오자 “예상보다 훨씬 비관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에쓰오일은 국내 정유 4사 중 이날 가장 먼저 1분기 실적을 발표했다. 결과는 1976년 창사 이후 가장 큰 손실(1조73억원)이었다. 정유업체들이 올 1분기(1~3월) 나란히 조(兆) 단위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유업계는 1분기보다 2분기 실적이 더 안 좋을 것이란 공감대가 있다. 정유업계 위기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시작됐는데, 미국 유럽 일본 등 석유제품 수요가 많은 국가들이 4월(2분기) 들어 확산되고 있어서다.
○실적 예상치 하루하루 ‘뚝뚝’
에쓰오일에 대한 증권업계 실적 전망치는 하루하루 낮아졌다.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인 2월 이 회사 예상실적은 3200억원 안팎이었다. 그러다 1개월 전엔 1444억원 손실로 바뀌었고, 최근 들어선 4700억원 손실로 악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이날 에쓰오일의 1조원 이상 영업손실은 시장 추정치보다 두 배나 많았다. 증권가뿐 아니라 다른 정유사 관계자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정유 부문의 손실이 컸다. 항공유와 휘발유 등 운송용 제품을 중심으로 석유제품 수요가 급락하며 4000억원 가까운 손실이 발생했다. 여기에 유가 급락으로 보유하고 있던 원유와 석유제품 모두 재고 가치가 감소했다. 이 부분에서 7000억원 안팎 손실로 집계되며 정유 부문에서만 1조1900억원의 손실을 냈다. 에쓰오일 관계자는 “재고 손실은 나중에 유가 상승 시 만회가 가능하지만, 정제마진 악화로 인한 손실은 만회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2분기 더 추락할 것”
정유업계에서는 에쓰오일의 조(兆) 단위 적자가 충격적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상황이 예상보다 심각하다는 뜻”이라며 “다른 정유사들도 대규모 영업손실을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당초 증권가와 정유업계에선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를 포함한 정유 4사가 3조원 이상의 적자를 낼 것이라고 봤으나 적자폭은 이제 4조원 이상으로 더 높아졌다.
정유업계는 2분기 실적을 더 우려하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이 장기화되면서 상황이 개선될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다. 실제로 코로나19 확산으로 미국, 유럽 등 세계 각국의 이동제한과 셧다운(일시 영업중단)이 3월부터 본격화되면서 석유 ‘수요절벽’이 다음달까지 장기화되는 분위기다. 지난달 배럴당 20~30달러 선으로 떨어졌던 국제 유가는 이달 들어 배럴당 10~20달러 선까지 주저앉았다.
정유업계는 공장 정기보수를 앞당겨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가동률을 낮추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2월 공장 가동률을 100%에서 85%로 낮췄으며, 현대오일뱅크도 하반기로 예정된 충남 대산공장의 정기보수를 하고 있다. GS칼텍스와 공장 가동률을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공장 가동률을 낮추는 것도 미리 계획된 상태에서 해야 한다”며 “바로 조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거래 재개하자마자 60% 폭락…원유 개미들 "전 재산 잃을 판"
'유가는 언젠간 회복한다'는 기대감에 '원유 선물 상장지수증권(ETN)'을 매수한 투자자의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실제 가치와 비교해 가격이 이상 급등하면서 거래가 정지됐던 서부텍사스산원유(WTI) 레버리지 ETN 4개 종목이 27일 거래가 재개되자마자 일제히 폭락했다.
이날 주식시장에서 'QV 레버리지 WTI 원유선물 ETN(H)'은 전 거래일보다 60% 급락한 500원에 거래를 마쳤고, '삼성 레버리지 WTI 원유선물 ETN'도 하한가(-59.95%)를 기록했다. 레버리지 상품은 주가 변동 범위도 일반 종목의 2배이기 때문에 -60~60% 사이에서 움직인다. '신한 레버리지 WTI 원유선물 ETN(H)'(-52.31%)과 '미래에셋 레버리지 원유선물혼합 ETN(H)'(-20.62%)도 곤두박질쳤다. 투자자의 시름은 날로 깊어지고 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원유 ETN 종목 토론방에서는 "전 재산을 잃을 판이다", "시간을 돌려달라" 같은 글이 올라왔다.
국제 유가가 연일 출렁이고 있다. 제공=AP
금융 당국 경고에도 개인 1조3000억 매수원유 레버리지 ETN은 기본적으로 위험성이 큰 상품이다. 기초자산인 국제 유가는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한다. WTI 6월물은 지난 20일(현지시간) 배럴당 20달러 선에서 연이틀 무너져 11달러 선으로 '반 토막' 났다가, 급반등해 24일 16.94달러로 마감했다. 어떻게 움직일지 투자자들이 갈피를 잡기 어렵다.
게다가 레버리지 ETN은 국제 유가 일간 등락률의 2배로 움직인다. 유가 상승기 땐 '대박'이 나지만, 하락기 또는 변동성이 클 땐 막대한 투자 손실을 떠안게 된다. 극도의 '고위험·고수익' 상품이다.
문제는 최근 유가 급락으로 '저가 매수'를 노린 투자자가 몰리면서 주가가 고평가돼 있단 점이다. 기초자산(유가)의 실제 가치와 시장가격(주가) 차이를 괴리율이라고 하는데, 이 비율이 1000% 넘는 종목까지 나왔다. 주가에 과도하게 거품이 끼어 있단 얘기다. 이에 한국거래소는 최근 원유 선물 레버리지 ETN에 대해 '전액 손실'을 경고하고, 일부 종목 거래를 중단시켰다. 27일부터는 30분 단위로 매수·매도 호가를 모아 가장 많은 수량에 체결될 수 있는 가격으로 거래(단일가 매매)를 진행하고 있다. 금융감독원도 투자 자제를 권고했다.
그럼에도 개인 투자자들은 이들 종목에 계속 관심을 보인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금감원이 소비자 경보를 발령한 다음 날인 지난 10일부터 24일까지 개인은 유가 상승에 베팅하는 ETN·ETF(상장지수펀드)를 총 1조3649억원어치 순매수했다. 27일 ETN 주가가 급락하자 '바닥이니 전 재산 몰빵하겠다'는 투자자도 있다. 전균 삼성증권 연구원은 "괴리율 400%인 레버리지 상품을 사면 유가가 2배는 올라야 본전인 셈"이라며 "요즘 같은 불확실한 유가 추이를 고려할 때 투자는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폭락에도 주가 거품 여전
원유 레버리지 ETN의 가격 정상화까지도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주가 급락에도 괴리율이 여전히 높아서다. 삼성 레버리지 WTI 원유선물 ETN의 경우 이날 오후 4시 기준 실제 가치(138.07원) 대비 괴리율은 504.77%를 기록했다. 통상 원유 ETN을 발행하는 증권사가 시장에 신규 물량을 내놓으면 주가를 떨어뜨려 시장가격과 실제 가치 차이를 좁히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지금처럼 괴리율이 높으면 별 소용없다. 증권사가 실제 가치의 ±6% 범위에서만 호가를 낼 수 있어서다. 시장가격이 떨어져 실제 가치와 가까워져야 증권사의 가격 조절 기능이 가능한 셈이다.
현재로선 이들 4개 종목은 주가 급락과 거래 정지를 수차례 거쳐야만 가격이 정상화될 것으로 보인다. 단일가 매매 상태에서 괴리율이 30% 이상인 종목은 3거래일간 거래 정지되는데, 이 과정을 반복하며 괴리율이 낮아질 수 있다. 다만 이렇게 되면 투자자의 고통은 한동안 계속될 수밖에 없다.
거래소 관계자는 "'1일 거래, 3일 정지' 사이클이 두 번은 반복돼야 시장이 안정될 것"이라며 "(투자자 손실은 크겠지만) 기존 투자자와 잠재적 투자자를 모두 고려해야 하는 측면이 있어 시장 안정화 조치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