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910) LG화학·SK이노베이션 ‘배터리 전쟁 2라운드’ 합의금 3조 vs 1000억...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이달 10일(미국 시각)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약칭 SKI)의 전기차 배터리 영업비밀(trade secrets) 침해 소송 최종 판결에서 LG의 손을 들어줬다. SKI의 영업비밀 침해를 인정하고 ‘향후 10년간 SKI의 미국내 배터리 수입·판매 및 유통 전면 금지 결정’을 내린 것이다. ·
이날로부터 60일간의 대통령 판결 검토(presidential review) 기간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이번 판결은 즉각 발효돼 폭스바겐과 포드와의 계약물량 공급(각 2년, 4년)을 제외한 SKI 제품의 미국내 생산과 수입이 불가능해진다. ·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이 기간 안에 영업비밀 침해 배상금을 포함해 양사가 전면 합의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두 회사는 판결 후 2주일이 지난 25일 현재까지 상당한 입장 차이를 보이며 맞서고 있다.
서울 여의도와 종로에 각각 있는 LG그룹 본사와 SK 본사 건물 모습
LG에너지솔루션(약칭 LGES)은 3조원 이상을 요구하는 반면, SK이노베이션은 1000억원대의 자회사 지분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SK의 한 임원은 “지난해 배터리 사업에서 5000억원 적자를 낸 회사에 3조원을 요구하는 것은 ‘배터리 사업을 중단하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라며 “사실상 협박하는 LG의 일방적인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LG 관계자는 “SK가 사실상 LG의 영업비밀 가치를 1원도 인정하지 않는 조건으로 나오고 있다”며 “30여년간 공들여 쌓은 LG의 영업비밀을 탈취하는 범죄 행위로 수십 조원을 수주한 SK가 가해자로서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성있게 협의에 임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양사 간의 공방을 5개 키워드를 중심으로 짚어본다.
◇① SK와 LG 주장 무엇이 다른가?
SK이노베이션측은 “3조원의 배상금은 우리가 앞으로 20년 이상 벌어야 하는 돈이다. 아직 손익분기점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는 내년(2022년)에야 겨우 소폭 흑자를 낼까말까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LG가 태도를 전향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대통령 거부권 시한 종료 후 연방항소법원 항소(抗訴) 같은 카드를 활용해 장기전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LGES측은 이에 대해 “LG로부터 탈취한 영업비밀을 사용하여 2017년 이후 SKI가 수주한 금액인 약 60조원과 미래 수주 예상금액을 보수적으로 예측해도 수십조원 이상 수주를 할 것으로 판단한다”며 “징벌적 배상액을 제외한 수조원대의 배상액은 합리적인 수준”이라고 맞서고 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2021년 2월10일 LG에너지솔루션(과거 LG화학의 배터리 사업 부문)과 SK이노베이션 간의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 관련 최종 판결문 일부로, ITC가 'SK이노베이션 배터리와 부품 등에 대해 미국 내 수입과 판매, 유통, 마케팅 등 10년 금지'를 명령한 내용이다.
미국 연방비밀보호법(DTSA)은 영업기밀을 탈취당한 기업이 가해(加害) 기업의 과거 수주 금액과 향후 수주로 얻을 미래 이익, 그리고 이로 인해 입은 피해 등을 종합해 합의 배상금을 요구할 수 있도록 인정하고 있다.
일각에선 양사가 합의없이 민사소송에 갈 경우, 손해액의 최대 2배까지 부과할 수 있는 징벌적 손해배상액과 변호사 비용 배상이 추가돼 SKI가 9조원 이상을 부담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글로벌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Credit Suisse)는 이달 11일자 보고서에서 “양사간의 합의금이 적어도 5조원 이상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② SK는 조 단위 배상 능력 안 되나?
“적자 회사로서 3조원대 배상금은 불가능하다”는 SKI의 주장은 어느 정도 타당할까. 현재 3조원을 투자해 미국 조지아주에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는 SKI는 앞으로 최대 6조원까지 투자 규모를 늘리겠다고 공언한 상태이다. 또 2025년 182조원 규모(IHS 마켓 조사 기준)로 성장할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점유율 10%(약 18조원)를 달성한다는 목표도 세워놓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먼저 1995년부터 배터리 연구개발을 시작한 LG에너지솔루션(약칭 LGES)도 이후 2020년 2분기까지 25년간 연속 적자(赤字)를 내면서 수십조원의 투자를 해왔다. LGES는 지난해(2020년) 처음 배터리 사업 부문에서 흑자를 냈다.
LG와 SK간의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 일지 및 해당 기업 비교
다른 하나는 SK이노베이션이 자회사 지분 매각과 기업 상장(IPO)을 통해 올 상반기에만 5조원 정도 현금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SKI의 자회사인 SK루브리컨츠는 다음달 26일 지분 100% 중 49% 매각을 통해 2조원 안팎의 자금을 확보하며, 다른 계열사인 SK종합화학도 지분 49% 매각을 추진 중인데 여기서 3조원대 현금이 가능하다. 상장예비심사가 진행 중인 SK아이이테크놀로지(SKIET)가 상장하면 최소 1조원의 현금을 마련할 수 있다.
SKI는 올 1월 컨퍼런스콜에서 “올해 상반기 중 윤활기유 사업 지분 매각, 페루 광구 매각 등으로 2조~3조원의 현금성 자산 확보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LG와 합의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자금’은 큰 문제가 안 된다는 게 재계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LG 관계자는 “SKI와 배상금액 총액에 대한 합의만 되면 현금, 현물, 로열티, 지분 등 다양한 방식이 가능하며 배상금을 다년(多年)간 분할 지급하는 방안도 수용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③ITC의 영업비밀 침해 판결, 다른 합의 사례는?
올해 1월 미국 일리노이주 북부 연방지방법원은 미국 모토로라솔루션의 연구개발(R&D) 직원 3명이 중국 하이테라커뮤니케이션에 이직해 무전기(DMR·Digital Mobile Radio) 관련 영업비밀을 탈취해 손해를 끼친 혐의에 대해 약 4억1000만달러(약 4500억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내렸다.
2018년 38억달러이던 DMR 세계 시장 규모는 2025년 75억달러로 성장이 예상된다. 이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미국 해당 법원은 부당이익(1억3500만달러)의 200%에 해당하는 징벌적 손해배상(2억7200만달러)을 적용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재계 관계자는 “DMR 시장 규모가 전기차 배터리 세계 시장과 비교해 10분의 1에 불과하고 영업비밀을 탈취한 전직(轉職)자도 3명 뿐임을 감안할 때, SK와 LG간의 영업 비밀 침해 보상금액을 가늠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SK는 지금까지 100여명의 LG 인력을 빼내간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ITC는 2020년 12월16일(현지시간) "대웅제약의 보툴리눔 톡신 제제 '나보타'(미국 제품명 주보)가 불공정 무역관행 제재 규정을 위반한 제품"이라며 '21개월간 미국 내 수입 금지'를 명령하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사진은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메디톡스 빌딩과 대웅제약 본사 모습
작년 12월 중순 미국 ITC가 한국 기업인 메디톡스와 대웅제약간 보톡스 소송에서 대웅제약의 영업비밀 침해 판정을 내린 후, 두 회사가 최근 합의한 내용도 눈길을 끈다. 대웅제약의 미국 파트너사 에볼루스는 메디톡스에 현금(3500만달러)과 2032년까지 판매 금액에 대한 로열티 지급, 파트너사인 에볼루스 지분(16.7%) 제공 등으로 합의했다.
바이오제약업계에서는 전체 배상금액 규모를 3000억~4000억원으로 추정한다. 이에 따라 대웅제약의 미국내 제품 판매도 곧 재개된다. 특히 대웅제약의 파트너사인 에볼루스는 2019년 996억원 적자, 2020년 3분기까지 577억원의 적자를 냈다. ITC가 명령한 수입 금지 기간(21개월)이 짧은데도 에볼루스가 이렇게 합의한 것은, 미래 수익 창출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보톡스 세계 시장 규모는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10% 수준이다.
◇④ 바이든 대통령 거부권 행사할까?
SK이노베이션이 기대하는 반전(反轉) 카드 중 하나는 조 바이든(Joe Biden) 대통령이 ITC 최종 판결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경우이다. 이렇게 되면 ITC가 결정한 수입 금지 조치가 해제돼 SK로선 큰 호재(好材)가 된다.
통계적으로 봤을 때 그 가능성은 낮다. 1916년 ITC 설립후 ‘영업비밀 침해’ 건에 대해 미국 대통령이 거부권을 쓴 사례가 전무(全無)하기 때문이다. SK 관계자는 그러나 “전기차 배터리가 친(親)환경을 중시하는 바이든 정부에서 국가 전략 품목으로 거론되는데다가, SK의 조지아 배터리 공장이 문 닫으면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거부권이 행사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전기차 배터리 공급을 다른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일자리 창출 등을 위해 미국 연방 정부와 조지아주 정부는 현지 배터리 제조공장을 최대한 늘리고 지키려 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2월19일(현지시간) 미국 미시간주 캘러머주에 있는 화이자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공장을 둘러본 뒤 연설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의 유력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즈(FT)는 이달 16일 바이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가능성과 관련, “ITC 판결을 뒤집기 위한 근거는 희박하다”며 “SK이노베이션이 만약 조지아주 공장에 투자를 지속할 수 없다면, 해당 공장에 새로운 투자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FT는 또 “(SK가 주장하는) 2600개의 일자리가 아직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현재까지 창출된 일자리는 300여개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손승우 중앙대 교수(산업보안학)는 “ITC가 폭스바겐과 포드 등 미국 내 공장에서 공급하는 경우에 한해 ‘공익(public)’을 명분으로 SKI에 각각 2년, 4년 동안 배터리를 공급할 수 있는 유예기간을 주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다시 공익을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은 더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➄ 시간은··LG와 SK, 어느 쪽 편인가?
바이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아 ITC 판결 효력이 발생하면, SK이노베이션은 연방고등법원에 항소한다는 방침이다. 연방고등법원 판결이 나온 뒤 델라웨어 연방법원 민사 소송으로 넘어가는데, 이 과정만 짧으면 1년, 길면 2~3년으로 예상된다.
SK 관계자는 “LG측에서 ‘(혐의를) 인정하고 성실하게 협상에 나서라’고 하지만 혐의를 인정하는 순간 범죄 기업으로 낙인이 찍힌다”며 “LG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했다.
미국 조지아주 잭슨카운티 커머스시에서 SK이노베이션 전기차 배터리 생산공장 착공식 모습
그러나 항소에서 패소한다면, 델라웨어 민사 소송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액과 법정 소송 비용까지 추가돼 SK가 내야할 배상금이 7조~8조원 이상으로 불어나게 된다. 2010년 이후 ITC 최종 판결에서 수입금지 명령이 내려진 영업비밀 침해 소송은 총 6건이다. 이 중 판결에 불복해 항소를 진행한 5건 가운데 결과가 뒤집힌 사례는 한 건도 없다.
LG에너지솔루션 직원들이 미국 미시간주 홀랜드 공장에서 전기차 배터리 셀을 검사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소송 장기화를 빌미로 SKI에 대한 공급사 계약을 바꿀 수 있다”며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LG가 SK이노베이션의 주력 시장 중 하나인 유럽에서도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홍대순 글로벌전략정책연구원장은 “양사가 조속한 합의에 실패할 경우, 강력한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공격적인 해외 수주 활동을 하는 CATL 등 중국 배터리 기업들이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챙길 가능성이 높다”며 “LG와 SK가 지혜롭게 접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르면 다음주 중 ITC가 SK이노베이션의 패소 사유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최종 판결 전문(全文)이 공개되면 양사간의 협상이 어떤 형태로든 시작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한편, 재계에서는 국내 대기업 서열 3위와 4위인 SK와 LG간의 초대형 해외 소송을 통해 그동안 국내에서 간과된 영업비밀의 가치와 중요성이 부각돼 중국 기업으로의 인력 및 기술 유출에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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